프롬프트를 능숙하게 짜고, 에이전트 다섯 개를 동시에 돌리고, 코드를 하루 만에 배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만들지는 늘 흐릿합니다. 어제는 챗봇, 오늘은 자동화 SaaS, 내일은 또 다른 무엇. 손은 빠른데 방향이 없는 겁니다. 이런 모습, 주변에서 한 번쯤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어쩌면 거울 속에서 봤을지도 모릅니다.
도구가 귀하던 시절엔 도구를 다루는 솜씨가 곧 실력이었습니다. 포토샵을 잘 다루는 디자이너, 엑셀 함수를 꿰는 회계 담당자. 도구를 익히는 데 든 시간이 그대로 경쟁력이 됐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같은 모델, 같은 에이전트를 누구나 씁니다. 솜씨는 빠르게 평준화됩니다. 그러니 던져야 할 질문이 슬쩍 옮겨갑니다.
도구는 실행기일 뿐입니다
도구는 방향을 정해 주지 않습니다. 시킨 일을 빠르게 해낼 뿐입니다. 무엇을 시킬지는 결국 사람이 정합니다. 바로 여기서 길이 갈립니다.
자기 철학이 없으면, 시킬 거리를 바깥에서 빌려 옵니다. 남이 만든 트렌드, 남이 정한 시장, 남이 외치는 정답. 그것들을 그대로 받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손은 내 손인데 머리는 남의 머리. 책을 쓰다 이런 문장을 적은 적이 있습니다. 철학 없이 도구만 있으면 남의 세계관을 실행하는 로봇이 된다. 도구가 정교할수록 그 로봇은 더 빠르고 충실하게 움직입니다. 방향이 틀렸다는 사실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실행이 싸진 시대에 이 함정은 더 깊어집니다. 예전엔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돈과 시간이 들었습니다. 큰 비용이 곧 제동 장치. 착수 전에 자연스럽게 한 번 멈추게 만들었으니까요. 왜 하필 이걸 만드는지 스스로 묻는 시간이 거기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멈춤이 사라졌습니다. 떠오르면 그날 밤 바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검증의 비용이 0에 가까워진 만큼, 우리는 더 자주 그리고 더 빠르게 남의 방향을 실행하게 됩니다. 멈춤이 사치가 된 시대. 손이 빨라질수록 멈춰 묻는 일은 더 귀해집니다.
세계관이 도구를 무기로 바꿉니다
같은 망치도 무엇을 지을지 아는 사람 손에서 비로소 집이 됩니다. 철학은 그 설계도입니다. 무엇을 만들지, 왜 하필 그것이어야 하는지를 향한 자기만의 답.
답이 또렷하면 도구 선택이 한결 쉬워집니다. 매주 쏟아지는 신기술 앞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 방향에 맞는 것만 골라 쥐면 그만이니까요. 남이 무엇을 내놓든 휘둘릴 일이 줄어듭니다. 그제야 도구는 남의 세계를 베끼는 복사기에서 벗어나, 내 세계를 짓는 무기로 바뀝니다.
한국의 작은 세무사 사무실을 떠올려 봅니다. 같은 AI를 들여도 한쪽은 유행하는 챗봇을 그냥 붙여 두고, 다른 한쪽은 매년 5월 종합소득세 신고 때 사장님 손이 가장 바쁜 지점을 정확히 덜어 줍니다. 도구는 똑같습니다. 갈린 건 그 사무실이 무엇을 풀고 싶은지를 아느냐였습니다.
그러니 먼저 물어야 할 건 도구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아닙니다. 그 도구로 어떤 세계를 짓고 싶은가, 이쪽입니다.
어스큐리가 직접 만드는 이유
어스큐리도 같은 갈림길에 섰습니다. 좋은 모델은 이미 시장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것들을 엮어 범용 도구 하나 더 내놓기란 어렵지 않은 일. 그런데도 우리는 그 길을 고르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하니까요.
대신 현장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동네 가게 한 곳에 며칠씩 들어가 옆자리에서 같이 일합니다. 무얼 하느냐고요? 그 자리에서 가장 아픈 한 가지를 덜어 주는 작은 도구를 만듭니다. 좁고 느린 길. 그래도 이 길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도구는 사람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사람 옆에 서야 한다. 우리가 믿는 세계는 그것입니다.
이 믿음이 곧 어스큐리의 설계도입니다. 새 기술이 나올 때마다 같은 질문으로 한 번 거릅니다. 이게 현장의 사람을 옆에서 도와주는가. 답이 아니면 멋져 보여도 쓰지 않습니다. 철학이 도구를 거르는 체가 되어 줍니다.
당신은 무엇을 만들고 싶습니까
도구는 앞으로 더 흔하고 더 똑똑해질 겁니다. 그럴수록 남의 세계관을 빠르게 실행하는 사람과, 자기 세계관을 천천히 짓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벌어집니다. 둘 다 같은 도구를 쥐고 있는데도요.
그러니 새 도구를 익히기 전에 한 가지를 먼저 정해 두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손으로 누구의 세계를 지을 것인가. 거창한 사명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풀고 싶은 단 하나.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 답을 쥐고 있으면, 어떤 도구가 와도 결국 내 무기. 손이 빨라도 방향이 없으면 로봇입니다. 느려도 제 방향을 아는 사람이 끝내 자기 것을 지어냅니다.
- Centaur model (인간+AI 협업)
- Vertical AI agents



